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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생애

 


 


 베토벤 독일의 본(Bonn)에서 출생하여 아버지로부터 초기 음악교육을 받았다.

 

11세에 학교를 떠나 니페(Neefe, 1748-98)의 작곡 제자가 되었고 이후 오르가니스트, 궁정 오케스트라의 쳄발로 주자 등으로 일했다.

 

14세 때 당시 새로운 선제후가 된 막스 프란츠는 음악가를 인정하는 편이어서 14세의 베토벤은 궁정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될 수 있었다. 그 후 폰 브로우닝 가족, 발트슈타인 백작을 알게 되었고, 어머니의 사망아버지의 알코올중독으로 사실상 가장 역할을 해야만 했다.

 

22세본(Bonn)에 들른 하이든을 만나 제자로 받아들여졌고 이후 베토벤은으로 떠나게 되었다. 

 빈에 온 베토벤은 몇몇 작곡가에게 교습받기도 하고 초기 작품들을 출판하기도 했다. 25세 되던 1795년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과 모차르트 협주곡을 연주하면서 빈 음악계에 데뷔했다.

 

 작곡과 연주 생활을 겸하면서 베를린, 프라하 등 연주 여행을 다니고 황제의 궁정에서 연주하기도 하는 등 점점 명성이 높아져 가던 베토벤은 피아노 소나타《비창》을 완성하던 1798년부터 귀에 이상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청각 장애는 지속해서 베토벤의 근심 원인이 되어 1802년에 하일리겐슈타트로 요양을 떠나는데, 이때 고통과 절망 속에서 두 아우에게 남긴 편지가 《하일리겐슈타트 유서》이다.

 

 하지만 그의 창작열은 사그라지지 않았고 계속하여 대작을 남겼는데, 교향곡 1, 2번과 피아노 협주곡 3번, 바이올린을 위한 《크로이처 소나타》를 비롯한 그의 중기 작품이 쏟아져 나왔다.

 이제 그의 명성은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게 되고 몇몇 절친한 귀족이 베토벤에게 종신 연금을 지불하기로 계약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귀족의 입지 및 상황도 어려워져 이 계약은 몇 년밖에 효력을 갖지 못했다. 나폴레옹의 빈 점령 및 그 당시 유럽을 휩쓸던 영웅적 분위기는 베토벤이 《황제》협주곡《운명》 교향곡과 6, 7번 교향곡오페라《피델리오》서곡《웰링톤의 승리》 등을 작곡했고, 40대 초반 베토벤의 명성은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1815년 45세 되던 베토벤의 동생이 죽으면서 그의 아들인 Karl의 후견인을 맡게 되며 새로운 전환점이 발생했다. 이 일로 지나치게 신경 쓴 나머지 정신적, 육체적으로 완전히 소진된 상태에 이르러 베토벤의 창작활동에 있어서 큰 손실이라 할 수 있었다. 피아노 소나타《햄머클라비어》를 완성하던 1819년, 즉 49세에 이르러 그는 완전히 청력을 잃게 되었고 생활 환경 또한 열악했다.

 50대에 이르는 베토벤은 여러 가지 병환에 시달리면서 마지막 2개의 소나타, 9번 교향곡을 썼고 그 이후로는 현악 4중주곡에 매달리게 되었다.

 

 1824년 이후 완전히 전념하게 된 현악 4중주는 오늘날에도 일반 청중으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작품이기도 하다. 조카와의 지속적인 반목과 병으로 고생하던 베토벤은 1827년 봄, 57세에 간경변으로 사망했다.


 

 


베토벤 음악의 전반적 특징


 베토벤은 음악의 역사에서 가장 많은 조명을 받고 전문가로부터 탁월한 작곡가로서 가장 많이 인정받은 작곡가이다. 베토벤의 음악은 음악 평론가에서부터 연주가, 그리고 일반 대중에게 인정받음과 동시에 사랑받음으로써 전문성과 대중성을 모두 갖추고 있는 셈이다. 베토벤은 자신의 시대에 귀족 청자를 위해 곡을 썼지만 다음 세대에는 후배 음악가들에게 극도의 존경을 받았고, 그러한 존경은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즉, 시대를 뛰어넘어서 변치 않는 위대성을 발하고 있다. 피아노 음악의 경우에 그의 피아노 소나타가 피아노 문헌에 있어서 신약성서로 불리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방대함

 

 소나타는 다른 작품 장르보다도 '진지한' 작품으로 이해한다. 어떤 묘사적인 제목을 갖는 것도 아니고, 여러 개의 악장에서 각기 나름의 성격을 발휘해야 하는 동시에 곡 전체적인 통일성 혹은 흐름까지도 고려해야 하는 점은 진지한 작곡 정신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소나타를 32곡이나 남긴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베토벤 이전 시대의 소나타의 비중과 베토벤 이후 소나타의 의미와 비중이 다르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균등한 수준

 


 하이든은 클라비어 소나타를 52개(Hob 번호에 의거) 남겼다. 슈베르트도 비록 미완성된 것이 몇 개 있긴 해도 20여 곡을 남겼다. 이럼에도 베토벤 소나타가 꼽히는 이유는 모든 소나타가 각기 수준이 높으며 독창성개성을 갖고 있어, 각각의 곡이 충분한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좀 더 유명한 곡, 덜 유명한 곡이 있는가 하면 난이도 높은 곡, 난이도 낮은 곡이 있긴 하다. 하지만 '베토벤이 썼다고 하기에는 저급한' 그런 곡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베토벤 소나타는 방대하면서 또한 모두 수준급작품이다. 


 

 


실험 정신

 


 베토벤은 많은 장르의 작품, 협주곡, 교향곡, 현악 4중주, 현악 소나타 등을 남겼다. 그의 소나타에 의해서 소나타-형식이라는 것이 확고한 형태로 자리 잡았고 세부적인 각 내용이 확장되고 충실해졌다. 느린 악장은 단순히 빠르기상에서 대조되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소리 울림을 표현하는 것이 되었다. 모차르트, 하이든에서 보이던 달콤하고 선율적인 멜로디 대신 무겁고, 느리게 진행되며 동기 위주로 처리되는 느린 악장이 되었다. 후기 소나타에서는 느린 악장이 변주, 혹은 푸가 형태의 악장과 짝을 이루게끔 만드는 시도를 하고 최종 악장에 무게중심을 더 두려 했다. 


 

 

 


주관성

 


 후기 소나타의 마지막 악장에서 보여지는 종류의 강력한 힘을 떠올리면 베토벤의 삶에 대한 투쟁과 명상 및 체념, 그리고 그 모든 인간적인 고난들을 초월한 의지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베토벤은 고전주의적 굴레를 벗어나 개인의 주관, 삶의 궤적이나 사상을 강하게 집어넣는 음악으로 낭만주의적 예술관을 보여주었다. 또한 형식이라는 틀에서 벗어났던 그의 독립성 역시 그의 강한 주관이다. 베토벤의 의지는 음악 안에서 지상을 뛰어넘는 것으로 나타나기에 그의 음악은 '승화'의 한 표현으로 여겨진다.

 베토벤은 그러한 자신의 주관성을 넋두리나 감상에 젖는 일 없이 직선적으로 음악에 표현하고 있다. 베토벤의 음악은 현란함으로 정신 팔리게 하지 않고, 그렇다고 편안하게 틀 안에 안주해 있는 것도 거부한, 자유롭고 진솔한 한 영혼의 고백이다.


 

 


보편성

 


  귀족에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19세기 동시대인들에서부터 21세기 오늘날 사람들에게까지, 가장 저명한 전문가에서부터 음악 아마추어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어필하는 점 역시 베토벤 음악의 위대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애호가들은 베토벤의 《월광》에 취하지만 연주가는《햄머클라비어》를 정복하고 싶어 하고, 분석가는《tempest》를 분석한다. 우리나라에서 한 월간지가 조사한, 피아니스트가 가장 선호하는 피아노 협주곡으로 베토벤 협주곡 4번이 1위를 차지했다. 즉, 연주자가 어느 수준에 있건 간에 신선한 도전 정신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박유미 「피아노 문헌」 음악춘추사(2011) p.11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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