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a href="https://pixabay.com/ko//?utm_source=link-attribution&amp;utm_medium=referral&amp;utm_campaign=image&amp;utm_content=3651248">Pixabay</a>로부터 입수된 <a href="https://pixabay.com/ko/users/em80-846530/?utm_source=link-attribution&amp;utm_medium=referral&amp;utm_campaign=image&amp;utm_content=3651248">EM80</a>님의 이미지 입니다.

 

슈베르트(Franz Schubert, 1797-1828)

 

 


 슈베르트는 피아노곡 작곡가로서 보단 가곡의 작곡가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과도기에 태어나 짧은 생애 동안 수많은 곡을 남겼는데, 서정적인 선율이 그의 가장 큰 장점이며 이러한 특성은 피아노곡에도 훌륭하게 나타났다. 고전주의적인 틀 안에서도 낭만 음악적인 선율과 화성이 배합된 멋진 작품을 남겼다.

 

 


생애



 슈베르트는 빈 교외의 작은 도시, 리히텐탈에서 태어났다. 가난하지만 따뜻한 가정에서 컸고,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을 나타내 아버지와 이웃 교회 오르가니스트로부터 초기 음악교육을 받았다.

 

 슈베르트는 1808년 아름다운 목소리와 뛰어난 초견 실력으로 왕실 궁정 예배당에 들어갈 수 있었고, 장학생으로 교육받을 수 있었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그곳에서도 선생을 놀라게 했다.

 

 1813년 변성기로 왕실의 혜택의 더 이상 받을 수 없게 되자 슈베르트는 1년간 교원 양성 과정을 마치고 아버지 학교의 조수로 일하게 된다.

 이때 이미 슈베르트는 작곡에 있어서 상당한 수준에 있었다. 조교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그는 제1번 교향곡을 완성했고 F장조 미사곡을 초연하여 이름을 알리게 된다.

 

 1814년 첫 가곡인 《물레잣는 그레첸》을 완성했다. 1815년까지 겨우 18세의 나이로 2개의 미사곡, 4곡의 오페라, 2개의 교향곡, 피아노곡을 작곡했으며, 무엇보다도 145개에 달하는 가곡을 이미 작곡했다.

 

 슈베르트가 단조로운 학교 조교 생활을 청산하고 작곡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맞이한 것은 1816년 말이다. 당시의 유명한 성악가 포글(Vogl)을 슈베르트와 연결하게 해 그의 가곡을 포글로 하여금 발표하는데 절친한 친구이던 쇼버(Schober)의 도움이 컸다.

 1818년부터 슈베르트는 에스테르하지 가문에 잠시 음악 가정교사로 들어가기도 했으나 대부분 빈에 머물면서 친구와는 행복한 교우 생활을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고달프고 가난한 생활을 하게 된다. 아침과 낮엔 주로 작곡에 전념했고 밤에는 그의 음악을 찬미하는 친구와의 모임 《슈베르티아데》를 가졌다. 슈베르트의 밤이란 뜻의 《슈베르티아데》는 1822~1823년에 절정에 달했는데 이 모임에는 친구뿐만 아니라 많은 시인, 화가들이 참석해 서로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이를 주제로 한 많은 작품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1820년(23세) 이후 슈베르트는 여러 작품을 연주, 출판하는 음악가로서 인정받는 보람이 있는 해를 보낼 수 있었으나 그의 창작력은 현저히 쇠퇴하게 된다. 이때부터 서서히 슈베르트는 병마에 시달리게 되는데 당시 사회에 한창 유행했던 매독에 걸린 것이다. 이 병은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슈베르트에게 큰 악영향을 끼쳐, 이전까지만 해도 마냥 천진난만한 소년과도 같던 슈베르트를 어둡고, 조울증에 시달리는 성격으로 바꿔놨다.

 작품은 차차 출판되기는 했지만 충분하지 않았고 게다가 비양심적인 출판업자 때문에 골치 아프게 된다.

 

 1826년과 27년에도 계속하여 작품이 나왔고 연가곡 《겨울 나그네》가 나왔다. 그러나 병은 점점 더 슈베르트를 옥죄고 절망에 빠지게 했다. 결국 슈베르트는 9개의 교향곡, 14개의 현악 4중주, 여러 종류의 실내악 및 독주곡, 그리고 600여개에 달하는 가곡을 남기고 1828년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음악 개관


 


 슈베르트는 그의 이름을 대표해 주는 가곡을 제외하고도 많은 위대한 기악곡을 남겼으니 이상하게 이 곡은 그의 생전에 별로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피아노 소나타 악장은 형식 논리가 결여되어 있고 치밀하지 못해 내용이 산만하다는 비난을 종종 받았다. 슈베르트가 피아노 음악에 있어서 대가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최근에 와서야 인정받았다.

 가곡에서 발휘된 슈베르트의 재능과 서정성은 그가 쓴 다른 큰 규모의 작품을 평가하는 데 있어 어떻게 보면 일종의 선입견으로 작용할 수 있다. 슈베르트는 생전에도 가곡에서 많은 찬사를 받고 유명해지기는 했지만 자신은 계속하여 큰 규모 작품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았다.

 슈베르트는 자주 베토벤과 비교했는데 슈베르트는 근본적으로 베토벤과는 작곡 방식이 다르다. 베토벤이 마치 '건축가'와 같은 개념으로 모티브 발전에 역점을 두어 치밀한 구성을 이루었다면 슈베르트의 경우 모티브보다 좀 더 선율 위주이며, 화성적 색채감에 비중을 둔 '감각적'인 개념의 음악을 작곡했다. 슈베르트의 경우 기존의 전통적 양식에 따라 많은 곡의 소나타를 남겼으며 안타깝게도 곡의 수준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편이다. 이러한 소나타와 더불어 자신만의 개성이 돋보이는 캐릭터 피스 역시 슈베르트 피아노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곡이다.

 슈베르트 음악을 언급하는 데 있어 문제점은 그의 작품이 분명한 연대기를 갖지 못한다는 점이다.

 

슈베르트는 예를 들어 1814년에 작곡한 자신의 가곡 《물레잣는 그레첸》작품번호 1을 붙였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여러 장르의 많은 곡을 작곡한 후였다. 따라서 슈베르트 자신이나 악보 출판사에서 매긴 그의 작품 번호(Op. 번호)작곡 연대와 전혀 상관없는 번호이다. 그러다 1951년 도이치(O. E. Deutch)가 1,000곡 가까이 되는 슈베르트의 전 작품 목록을 연대순으로 정리하는 중요한 작업을 했고 이를 D(Deutch) 번호로 칭하게 된다.

 

오늘날엔 Op. 번호와 D. 번호를 한꺼번에 쓰지만 Op. 번호가 애초에 붙어있지 않은 곡이 많으며, D. 번호가 작품연대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으므로 사용하기에 더 편리하다.

 

 

 

 

 

 

 

박유미 「피아노 문헌」 음악춘추사(2011) p. 148-15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