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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델스존(Felix Mendelssohn, 1809-1847)


 


생애


 


 북부 독일 함부르크의 명망 있는 유대인 가문에서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유복하게 성장했다. 할아버지는 독일 계몽시대 철학자이자 라이프니츠 볼프 학파의 한 사람으로, 유대인 계몽주의 운동인 하스칼라의 선구자이기도 한 모제스 멘델스존이었으며, 아버지 아브라함 멘델스존은 부유한 은행장이었다. 다만 멘델스존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사이는 소원했는데, 주류사회로의 동화를 추구한 하스칼라의 선구자이긴 했지만 본인의 혈통 자체에는 자부심이 있던 할아버지와 달리, 아버지는 유대교와 유대인 혈통을 구시대적인 것으로 여겨 개신교로 개종하고 성까지 아내의 성인 바르톨디(Bartholdy)로 갈아치울 중도로 열렬한 동화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아마추어 음악인이자 영문학/불문학/이탈리아 문학가이고 누이들과도 화목하게 지냈는데 누나인 파니 멘델스존(1805~1847)에게 특히 꽤 의지했다. 파니 역시 음악가였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홀대받았다.

 아름다운 아내 세실 샤를로트 소피 장르노(Cécile Charlotte Sophie Jeanrenaud,1817~1853)와 결혼하여 자녀 다섯 명을 낳고, 그들과 더불어 행복한 가정생활까지 향유했던 걸 생각하면, 음악가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었던 행운아였다. 멘델스존 자신의 재능을 제쳐두고서라도 축복받은 인생. 당대 최고의 문호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어린 멘델스존의 천재성을 보고 칭찬했다는 사실만 봐도, 괴테를 만날 수 있을 만한 가문의 자제, 빛나는 천재성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괴테가 멘델스존의 연주를 듣고 "저 아이의 실력에 비하면 모차르트는 어린애가 빽빽거리며 소리지르는 수준일 뿐이야."라고 말할 정도였다. 참고로 베토벤의 제자였으나 묻혀진 음악가 이그나츠 모셸레스(Ignaz Moscheles,1794~1870)도 유태인이었고 멘델스존을 어릴 적에 가르치는 스승 중 하나이다.

 바그너 말고도 멘델스존은 생전에 비판당한 적이 많았다. 일례로 '음악이 지나치게 분위기가 밝기만 하고 깊이가 없다', '평범한 음악가들의 생계 문제에 신경 쓰지도 않는 거만한 도련님' 등등. 멘델스존 본인은 가난한 연주자들의 복지 문제에 상당히 관심이 있었고, 이것을 개선하려고 꽤 노력했으므로 그의 입장에선 억울한 주장인데 이런 비판은 유복한 환경만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다만 성격 면에서는 어릴 때부터 그리 좋지 않았다는 소문이 있는데, 어린 시절 멘델스존이 화내면 어머니 외에는 아무도 말릴 수 없었고 그나마 어머니도 손을 잡고 재우는 방법만이 유일했으며, 어른이 되어서도 라이프치히 음악학교 교수 재임 시절에 멘델스존이 제자를 인격에 토대해 모욕하고 그것을 낙서해 동료 교수들과 낄낄거렸다는 기록을 고려하면 매우 한정된 사람하고만 쉽게 잘 사귀는 인재였던 듯하다. 즉, 동시대 음악가들한테 부러움의 시샘이 아닌 진짜 미움받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멘델스존의 천재성은 음악 작곡보다는 독일의 음악상 위상을 제고하는 곳에 더 많이 쓰였다고 간주한다. 라이프치히 음악학교의 이름이 라이프치히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 예술대학이라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학교의 설립자이자 교수였고 슈만과 함께 경제상으로 어려운 음악가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려고 많이 노력하는 등 수 많은 일을 했고 독일의 음악상 위상은 실제로 아주 높아졌다. 당대 트로이카 중 한 명이던 쇼팽에게도 높은 금액의 공연료를 주면서 연주할 기회를 주기도 하고 많은 업적을 남긴 음악가였지만, 아깝게도 38세에 요절하고 만다. 죽기 전에는 악화한 건강으로 고생했는데 과로가 건강을 더욱 악화하게 한 듯하다. 그 와중에 누나 파니의 급작스러운 사망이 멘델스존에게 지울 수 없는 큰 비통에 빠지게 했고 그후 그 애통한 충격으로 6개월이 채 되지않아 멘델스존도 뇌졸중으로 숨을 거두고 만다. 

 펠릭스 멘델스존은 독일 함부르크 태상의 작곡가이며 여러 분야에 두각을 나타낸 천재이다. 피아노 음악에서보다는 오케스트라곡(5곡의 교향곡 및 서곡), 연극음악(한여름 밤의 꿈)에서 더 이름을 알렸고 헨델, 바흐의 음악을 발골하고 연주하는 등 옛 음악을 알리는 데 기여했다. 피아노에선 그다지 큰 즐거움으로 작곡하지 않게 된다고 고백한 적도 있는 만큼, 관현악 분야의 기여와는 달리 큰 흥미가 없었음을 보여준다. 피아노곡에서는 큰 형식보다는 작은 형식에 더 뛰어나 《무언가》등의 작은 소품집을 많이 남겼으며, 자주 연주하는 큰 형식의 걸작으로는 《엄격변주곡》Op. 54가 있다.

《무언가(Lied ohne Worte)》는 1830년대 이후 피아노 음악에 침범해온 낭만주의 물결의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다. 1830년대는 피아노 음악에서 상당히 중요하게 간주되어야 할 연대이다. 슈만의 Op. 1《아베크 변주곡》이 1830년에 나왔고 쇼팽은 폴란드를 떠났는데 그의 대부분의 작품이 그 직후부터 쓰여졌다.

 1828년에서 1845년 사이에 쓰여진 총 50곡의 《무언가》의 제목 그 자체는 멘델스존 개인의 발명품이다. "가사없는 노래"란 의미《무언가》는 그 제목에서부터 "피아노로 하는 노래"를 의도한다. 이제 피아노는 목소리를 대신할 수 있을 만큼 서정적 노래가 가능한 악기인 것이다. 몇몇 곡들은 따로 제목이 붙어 있기도 한데, 3개의 "베네티아 뱃노래", "사냥 노래", "봄의 노래", "실 잣는 노래", "장송곡", "민요" 등이 있다.

 1841년 완성된 《엄격변주곡(Variation Serieuses)》Op. 54은 친구 관계였던 클라라 슈만에 의해 초연되었다. 4성부의 엄격한 주제로 시작되는 이 변주곡은 고전적 형태의 변주곡을 따르고 있다. 즉, 어느 변주건 주제 자체를 벗어던지지 않는다. 총 17곡의 변주로 되어있고 여러 종류의 기교적 연습이 등장한다. 상당히 화려하고 효과적이어서 학생들의 연습용으로도, 연주자의 레퍼토리로도 사랑받는 곡이다. 

 

멘델스존 엄격변주곡 Op. 54 시작 부분

 


 멘델스존은 3곡의 《소나타》를 남겼는데, 12세 때 작품인 Op. 105는 작고 쉬운 작품이고 나머지 두곡 Op.6, Op. 106도 모두 10대 시절에 쓰여진 곡이다. 두 곡은 4악장의 순환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Op. 6에서는 레치타티브의 사용, Op. 106에서는 베토벤의 《햄머클라비어》의 영향이 나타난다.

 멘델스존이 남긴 피아노곡 《카프리치오소》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이들의 성격을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렵고 그저 '변덕스런, 일시적인' 느낌의 곡이라 해야할 것이다. 총 10곡이 있는데 그 중 《론도 카프리치오소(Rondo Caproccioso)》Op. 14가 유명하다. 

 

멘델스존 론도 카프리치오소 시작 부분

 

멘델스존 론도 카프리치오소 중간 부분

 

 

 

 

 

 

 

나무위키

박유미 「피아노 문헌」 음악춘추사(2011) p.165-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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