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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Frédéric François Chopin, 1810-1849)

 

 


생애


 

 

 쇼팽폴란드 바르샤바 근처의 젤라조바 볼라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폴란드에 일자리를 얻으러 온 프랑스인 아너비와 폴란드인 어머니 사이의 혼혈이었던 쇼팽은 생애 최초 20년은 폴란드에서, 나머지 20년은 프랑스에서 보냈다.

 

쇼팽은 7세협주곡을 연주할 정도의 신동이었으며 초기 작품폴로네이즈, 마주르카, 왈츠 등이었다.

 

15세에 그의 첫 작품이 출판되어 나왔고, 20세 직전 베를린, 빈, 프라하 등 유럽 여러 도시에서 연주회를 가졌으며 그 직후인 1830년 폴란드를 떠나오게 되었다. 그 시기에 이미 그의 2개의 피아노 협주곡이 완성되어 있었다. 바르샤바를 떠나오면서 연 고별 연주회에서도 자신의 e 단조 협주곡을 연주했다.

 

 처음에 빈에 정착하려던 쇼팽은 난관에 부딪히게 되는데,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던데다가 정치적으로 오스트리아가 폴란드와 적대적인 관계로 변하게 된 상황이라, 빈에서 폴란드인에 대한 반감을 느끼게 되었다. 결국 그곳의 냉담한 반응으로 실망하게 된 쇼팽은 방향을 틀어 다음 해인 31년에 파리에 정착했다. 당시 파리는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사상적으로나 행동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도시였다. 온갖 문화인, 예술인, 지식인의 집회 장소가 되어 있었으며 그로 인해 낭만주의 운동이 문화, 회화, 음악에 일어났던 것이다.

 

 쇼팽은 파리를 자신의 '집'으로 생각하기 시작했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 때부터 주로 작곡과 개인 교습에 시간을 썼다. 연주자로서의 경력은 스스로의 기질에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연주세련된 양식, 자작곡의 화려함, 쇼팽이 천부적으로 갖춘 귀족적이고 우아한 태도 덕분에 많은 귀족들이 매혹되어 그에게 레슨 받길 원했다.

 

 1837년 리스트는 쇼팽에게 유명한 여성작가인 조르주 상드를 소개해 주었고 그로부터 시작된 쇼팽-상드의 로맨스는 거의 10년을 가게 된다. 1837년에서 1846년 사이에는 주로 노앙(Nohant)에 있는 조르주 상드의 집에 머물면서 그곳에서 많은 곡을 썼다. 파리 상류 사회에 완전히 적응하면서 쇼팽은 리스트, 들라쿠아, 하이네, 발자크 등 예술가나 문인들과 교분을 맺기도 한다.

 

1835년 라이프치히에서 알게 된 슈만클라라와도 이후 계속하여 우정을 나누게 되는데, 1839년 슈만은 쇼팽의 프렐류드, 마주르카, 왈츠 등을 자신의 《음악신보》에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 시대 가장 거칠고 자존심 강한 시적 영혼이다."

 

 마치 부모와 같은 조르주 상드의 보살핌 속에, 건강이 악화되고 있음에도 원숙한 작품을 쓴 쇼팽은 1846년 그녀와 헤어질 즈음엔 심신이 모두 지쳐 작곡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게다가 생활도 형편없어져 1848년 2월 파리에 혁명이 일어났을 때 영국으로 건너가 생활의 터전을 구하고자 했다. 그곳에서 스코틀랜드 순회 연주를 갖게 되는데 그곳의 안개낀 기후는 쇼팽의 건강에 치명적이었다. 그 해 11월, 다시 파리로 돌아온 쇼팽은 결국 다시 일어나지 못한 채 다음 해 내내 병상에 있었으며 49년 10월, 39세로 생을 마감했다.

 

 

 

 


쇼팽 피아노 음악의 전반적 특성


 

 

 쇼팽의 음악은 전적으로 피아노 음악에 한정되어 있고 그외에는 항상 피아노가 포함된 실내악곡을 썼다. 따라서 쇼팽의 음악적 가치는 전체 서양 음악사에서보다 피아노 음악 문헌에서 훨씬 그 빛을 발했다. 쇼팽이 피아노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던 19세기 초, 피아노는 새로운 악기로 탈바꿈했다.

 

18세기 피아노하프시코드 소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이후 해머를 부드러운 펠트나 가죽으로 싸기 시작하는 새로운 경향이 생기면서 피아노 소리는 부드러운 톤을 내게 되었고, 개량된 악기는 이제 낭만주의 시대에 표현을 위한 적절한 도구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악기 액션이 발전되면서 더욱 빠른 트릴과 반복음이 가능해졌다. 쇼팽이 선호하던 피아노 스타일은 광택이 있으면서 베일에 싸인 듯한 소리, 가벼운 터치의 피아노였다고 한다. 당시는 파워풀한 피아노 연주 스타일을 선호하던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쇼팽은 섬세한 스타일을 고집했다.

 

 

 


쇼팽 음악의 국제적 요소


 

 

 쇼팽은 폴란드와 프랑스의 피가 섞여 있던 만큼 그의 음악에서도 이 두 요소를 집어낼 수 있다. 악곡 형식으로 폴란드 민속 무곡을 빌려 쓴 것, 그리고 리듬, 화성, 음계에 이르기까지 슬라브 특유의 동양적 기질이 엿보인다는 것은 모두 폴란드인으로서의 현저한 특징이다. 그의 악곡에 나타나고 있는 화려한 장식과 정갈한 끝맺음, 귀족 취향, 선명한 음악적 구조 등은 파리의 귀족 사회반영한 것이다. 

 

 리스트는 쇼팽의 기질 중 한 면을 이야기하면서 폴란드인 특유의 "zal"을 언급한다. zal이란 마음속 깊이에 응어리진 비애에 찬 심술, 원한 및 복수감을 말한다. 또한 시인 하이네의 표현에 따르면, "폴란드는 그에게 기사도적인 감성, 역사적 아픔의 감성을 주고 프랑스는 그 편안함우아함을, 독일 꿈꾸는 듯한 깊이를 주었다."

 

 즉, 탄생지 폴란드의 민족적인 아픔과 회환의 정서는 프랑스의 세련되고 정형화된 양식과 독일의 대위법적인 기법에 결합했다할 수 있으며, 이러한 성격은 쇼팽에게 우수어린 감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형식적으로 탄탄하며 화려한, 피아노의 기교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대가로 만들었다. 특히 쇼팽의 화성은 이후 작곡가에게 영향을 미쳐 리스트, 바그너의 음악극과 러시아 악파들의 음악에 영향을 끼쳤으며, 좀더 나아가 프랑스 인상주의에서 쇼팽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박유미 「피아노 문헌」 음악춘추사(2011) p. 195-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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